선생은 21세 나이로 평시서령(平市署令)을 버리고 살곳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왔으니 단종이 영월로 안치되던 을해(1455)년이었다.
거처할 집을 짓는데 마루를 북쪽으로 하고 방은 남쪽에 마련하여 마루가 삼분의 이를 찾이 하였다,
방은 동남쪽은 벽이고 엇창살을 그 위에 설치해 겨우 채광만 하도록 하였으며 마루또한 동서쪽은 벽이고 북쪽은 비워 두었다. 마루와 방 사이는 종이를 발라 가리워졌고 그 중간에 종이로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하였으니 흡사 두 개의 굴 같이 되어 있어서 머리를 들고 멀리 바라보면 오직 북쪽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촌경(村卿)의 지세는 대개 동남쪽이고 사람이 사는 집은 북을 등지고 남향이라 마땅한데 집이 낮고 좁을뿐더러 너무나 옹색함이 이와 같으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깨달을 수 없다.
①창운(蒼雲) 權公은 선생의 재세시의 세태를 논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 벽은 천길 절벽 밑에 서 있는 의기와 절조이자”라고 하여 그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이름짓고 집을 공북헌(拱北軒)이라 하였으며 ②눌은(訥隱) 李公이 그 뒤에 지은 글에서 “선생은 이때에 겨우 벼슬길에 나섰고 집현전 제위의 문종(文宗) 탁고지열(託顧之列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나 그저 자기의 처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숨어 살면서도 세조 밑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면 그 뿐이였으나 감히 평인으로 자처하지 않고 평일 처신 하는것을 죄수보다 더 심하게 하면서 늘 오직 영월(寧越)의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일삼았으니 대개 자신을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한 신하라 생각하고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선생의 뜻이다”라고 말하였다.
치악산(雉嶽山)에서 쓴 제명 소첩자(小帖子)가 발견된 후에 선생의 지조와 행적이 비로서 완전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③관란(觀瀾) 元公은 곧 세상에서 일컬어지는 생육신(生六臣)이고 선생이 二公과 같이 제명한 것이 실제로 경태(景泰) 병자(1456)년 육신(六臣)이 슬픈 변을 당하기 약간일 전이니 선생이 거처하시던 방의 제도가 곧 육신(六臣)이 후회없이 죽은 마음이라 진실로 또한 괴로운 일이였을게다.
다만 눌옹(訥翁)이 집의 구조를 설명 할 때 “이미 마루는 없어졌지만 동쪽벽은 아직도 그 흔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이 일찍이 집을 그렇게 지은 연유를 스스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침침하고 옹색함이 괴로워 헐어버린 것이였겠으나 이것을 보고 들은 원근 사람들이 한격 같이 개탄하였다.
이에 선생의 八세손 종문(宗文)이 종중에서 공론하기를 ”조상의 유거(遺居)에서 세거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조상의 유제(舊制)를 복구 하는것이 고인이 집을 지을 때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의미다“라고 하여 드디어 그 자리에서 동쪽벽을 세워 흙으로 바르고 담장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잠궈두니 비로서 마루와 방이 선생이 계실 때와 같이되어서 초목이 무성한 ④백월(百粤)의 산세가 어렴풋이나마 책상 앞에 나타타 이 방에서 거처하시던 선생을 그리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가.
한가롭게 이방을 들어와 바라보는 사람은 단종이 안치당했던 영월 땅을 바라 볼 것이며 편하개 의자에 기대어 바라보는 사람은 자규루에 경의를 표 할것을 숭앙하는 장소를 마련하여 그 루(樓)를 공극(拱極)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본받아야 될 교화는 백세를 지나더라도 후인들에게 흥기시킬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평생을 생각 할 때 탄식하고 슬퍼할 일이요 공경해야 될 일이다.
나는 선생보다 먼 후세에 태어나 이전에 남모르게 선생이 거처하시던 집을 가 보았는데 옛구조 그대로 집이 중수 되었음을 다행하게 여겨 드디어 분수에 넘치고 망렬스러움을 헤아리지 않고 중수한 전말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때는 병자(1768)년 10월
前 행익위사(行翼衛司) 익위(翊衛) 진성(眞城) 후인(後人)
이인행(李仁行) 삼가씀
【註】
① 蒼雲 權公 權公 [효종5(1654)년 ~ 영조2(1726)년] 충재 권벌의 5대손
② 訥隱 李公 : 李光庭
③ 觀瀾 元公 : 元昊
④ 백월(百粤) : 중국의 남쪽 지방으로 현재의 廣東省 지방, 진시황이 中縣의
백성을 백월땅으로 옮겨 그곳 사람들과 雜居 시켰다.
여기서는 단종이 안치당한 寧越을 지칭함